검은날개둥지의 벨라스트라즈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 친하게 지내던 C라는 사람이 있었다. C는 언데드 여성치고는 비교적 준수한 외모를 가진 마법사로 직접만든 가방을 경매장에서 팔아 조금씩 골드가 모이는것이 취미인 사람이었다. C와의 인연은 불타는 평원 한가운데서 애타게 길을 묻던 그녀를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녀가 목놓아 외쳤던 행선지가 마침 내가 가려던 곳과 비슷한 방향이었기에 길을 알려줄 요량으로 그녀를 파티에 초대했다.
"그런데 여기 퀘스트를 하기에 법사님 레벨이 많이 부족할것 같은데요. 이쪽 몹들은 레벨이 높거든요."
"네..그러네요..알긴 아는데... 꼭 하고 싶은 퀘스트가 있어서요."
알고보니 그녀가 하려던 퀘스트의 보상이 재봉술 도안이었다.
그녀는 단지, 그리 대단할게 없는 재봉술 도안이 가지고 싶어서 자신의 레벨에 맞지도 않는 지역으로올 모험을 감행하게 된 것 이었다.
생각해보니 이곳까지 이곳까지 오는길, 저랩인 그녀에게 수많은 몹들이 달려들었을텐데 어찌 여기까지 왔나 싶기도 했다. 아마도 숱하게 죽어가며 시체를 끌어 이곳까지 왔으리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긴했지만, 화산심장부 레이드를 위해 집결지로 가야할 시간이 임박했기에 그냥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미안함인지 혹은 측은한 마음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레이드 내내 마음속 한구석이 조금 불편했다.
아마 지금도 그 언데드 마법사는 몹들에게 둘러쌓여 차가운 바닥에 쓰러지기를 반복하고 있겠지.
어쨌든, 그날도 난 공대원들과 거대한 레이드 보스를 눕히고 에픽전리품을 가방속에 챙겨 넣었다.
C를 다시 만난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 지나서 였다.
은행 앞 우체통을 등지고 끙끙거리며 열심히 12칸짜리 가방을 만들고 있는 C를 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퀘는 완료 하셨어요?" ..물론 그녀 혼자서 완료했을리가 없다.
"아!! 안녕하세요!!..몹들이 너무 쎄서... 세시간 정도 했는데 도저히 안되서 포기했어요. 나중에 레벨이 더 높아지면 해보려구요."
그녀는 못생긴 치아를 드러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 동안 레벨업도 거의 못한것 같다.
"길드나.. 아는 사람 없어요?"
"부탁하기 미안해서요. 다들 바쁜데.."
돌이켜 보자면 아마도 그것은 마음의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베푼 친절이었던것 같다.
나는 C의 손을 붙잡고는 불타는 평원의 한 동굴로 들어갔다. 퀘스트 완료를 위해 처치해야할 몬스터는 나의 손짓 한 번에 허무하게 꼬꾸라졌다.
" 와..!! 님, 엄청 쎄네요!! 쟤가 한 번에 죽었어요+_+ "
" 저 별로 쎈거 아니에요^^;; 전 매일 맞기만 하는걸요."
C는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하며 몇번이나 허리를 숙였다. 나도 왠지 좋은일은 한것 같아 기분이 으쓱했던것 같다.
다음날, 그녀는 아이템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보잘것 없는 스텟이 붙은 녹색등급 복면이었다.
물론 검은용, 넬타리온의 딸 오닉시아를 다운시키고 티어세트 머리부위를 보유한 나에게는 필요없는 물건이었다.
'겨우 이런 도안을 그렇게 갖고 싶었나..?"
"어제 얻은 도안으로 만든거에요!! 1호는 고마우신 사제님 드릴께요!!"
그녀가 만든 복면을 한 번 써보았다. 만든 솜씨가 제법이다.
"와우!! 잘 어울리신다 ^_^"
"..역시 그렇죠? 옷걸이가 좋으니까~ ㅋㅋㅋ"
어쩐지.. 나는 그 녹템 복면이 마음에 들어버렸다.
그때부터 필드에서 사냥을 할때면 난 항상 그 복면을 쓰고 다니곤했다.
수년이 흘렀다. 나는 잠시 WOW를 쉬었고 어느날 다시 접속했을때, 세계는 많이 변해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백의종군한 기분으로 1레벨 캐릭터를 생성하여 아제로스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미 주무대가 노스렌드로 옮겨진 지금, 아제로스 대륙에는 더 이상 나이 어린 (레벨이 낮은) 플레이어가 없다.
물론, 간혹가다 저랩 유저들을 만나긴 한다. 하지만 죄다 계정귀속템으로 무장하고 있다.
신규유저가 아니라 이미 만랩 캐릭터를 가진 이의 두번째 혹은 세,네번째 캐릭터란 이야기다.
초창기의 풋풋한 기억들이 서려있는 장소들을 다시 밟으며 나름대로 감회에 젖어있다가도, 대륙 여기저기를 폴짝폴짝 뛰어다녀야 할 신규 플레이어가 사라진 아제로스 대륙을 보고 있자니 WOW도 이젠 너무 나이를 먹었구나 라는 생각이 안들 수가 없더라
말하자면, WOW는 너무 늙어버린것이다. 더 이상 발기조차되지 않는 다섯살짜리 중늙은이마냥.
힘이 다한 아제로스 대륙에는 더 이상의 두근거림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감도 없다.
레이드 던젼이나 일반 5인 인스턴스나 모두 잘난 전문가들 뿐이다.
조금만 실수를 하면 죽을죄를 지은것 마냥 파티창은 난리가 난다.
'나참, 그것도 몰라요?' 초보 모험가는 무엇을 묻기 조차 두려운 분위기.
인스턴스 던전에 진입하면 몹이 무섭고 네임드가 두려워야 하는데, 이제는 사람이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이 연을 끊지 못하고 나는 또 다시 접속 버튼을 누른다.
단지 관성때문만일까.